로비와 제스

자컾

정확히 표현함은 참 어려운 것이다. 당신을 마주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어려운 대화를 하는 것도 아니다. 익숙한 언어로 평범한 이야기를 하는데도 그렇다. 심지어 당신은 나를 배려해 단순하고 직설적인 어휘를 사용해 주었다. 꼭 대화만 있는 게 아니다. 당신과 편안한 침묵을 공유할 때도 그러하다. 난제다. 이상하게도 안에 담긴 마음을 명확히 표현할 수가 ...

오늘로 성문을 에워싼 반역도는 모조리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 불충한 육신이 바스러지고 부도덕한 생명이 흘러갈 땅에는 위대한 황제 폐하와 고귀한 귀족들의 은총이 내려질 테다. 역사에는 무어라 적히게 될까. 제스 비숍은 아우성으로 가득한 창 너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커튼을 풀어 내렸다. 지대가 높은 데다 바로 뒤가 파도치는 절벽이라 찬 바람이 심한 ...

제스에게 무슨 일이 생겼던 걸까요? :)

샹들리에는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고 눈부셨다. 빳빳한 촛대는 태양 조각을 머금은 마냥 이글이글 타오르고, 굽이치는 선에 매달린 투명한 보석들은 밤하늘의 별을 따다 걸어놓은 듯 아름답게 반짝였다. 그 아래를 배회하는 사람들은 또 어떠한가. 은은한 빛깔의 옷을 차려입고 입가엔 미소를 아로새긴 고귀한 인간들이 빙글빙글 춤을 추고 있었다. 금을 주고도 못 살 악기...

제스 씨

평화란, 튀어나온 가시를 모조리 제거하고 칠까지 마친 목제 가구 같은 거다. 완벽히 제어되는 주변 환경과 온전한 당사자가 있어야만 하는 섬세한 작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스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평화로우며 완전하고 만족스럽다고 생각했다. 저택은 고요하여 그 어떠한 모욕도 침묵의 문턱을 넘지 못하였으며, 나무판 위의 이들은 안락한 집 안에서 어떠한 상...

우리집 로벤트는 물방울 나온다

새하얀 대리석 위에 놓인 대야는 밤보다 어둡고 잠보다 컴컴한 색이었다. 그 둥근 몸통에 담긴 물은 그믐달을 녹여 담은 듯 새카맣고 흑요석처럼 반질반질했다. 남자는 그 검은 우물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고작해야 두 발 넣을 만큼 작은 수면에 형체가 일그러진 사람이 나타났다 흩어지길 반복했다. 사내는 강도 호수도 없는 새하얀 저택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언제 생...

빙글빙글 굴러가는 인생

서늘한 이슬 한 방울이 입술 위로 떨어졌다. 아직 때 묻지 않은 투명한 물방울은 매끄러운 입술 선을 타고 흘러내려 턱선까지 닿았다.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맑은 물은 푸른 나무와 성근 덩굴을 품에안고 똑, 쇄골로 떨어졌다. 충격에 살짝 넓적해진 그것은 은근히 움직이며 두드러진 뼈대를 훑다가 발을 헛디뎌 핏기없는 가슴팍으로 흘러들었다. 비스듬한 상체가 반짝였다....

렡비우스의 띠

자비로운 대지는 자그마한 생명이 그 어떤 곳을 가더라도 버림받지 않도록 드넓은 가슴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이 토양을 딛고 선 것들은 관용을 무시하여 감히 그 뜻을 조각내어 속되게 만들었다. 그들은 피로써 이름을 쓰고 죽음으로써 선을 그었다. 한때 같은 부모를 가졌던 이들은 다른 하늘을 모시고, 같은 피를 흘리는 이들은 서로를 욕되게 하였다. 베르 제국 또...

엥

가을 특유의 청명한 기운이 유독 도드라지는 날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은 뛰어오르면 저 깊은 곳으로 빠져버릴 듯 새파랬고, 땅을 가진 나무는 귀부인의 드레스처럼 아름다운 붉은 색으로 반짝였다. 따가운 햇볕에 찔린 살갗을 선선한 바람이 어루만져주니 야외 활동하기에도 딱 맞았다. 이 날씨에 홀린 사람 중에는 로벤트도 있었다. 일을 얼추 마친 그는 제...

D+444 / 그의 4월 44일은 오직 제스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4월은 젊음의 기쁨이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달이다. 싱그러운 햇살, 고요한 바람, 파릇파릇한 이파리와 청명한 흙내음이 넘실거리는 때. 흰 구름이 하늘을 헤치며 시원한 유람을 즐기는 순간. 생명이 깨어나는 3월과는 조금 다른 활력이 넘쳐나는 찰나는 영원히 간직하고 싶을 만큼 아름답고 향기로웠다. 이 찬란한 계절의 어느 날 로벤트는 간만에 맞이한 휴가를 ...

한낮의 빛이 남긴 그림자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처럼 어둡고 진했다. 다시 새로운 해들이 떠오르더라도 진득하니 남아 사라지지 않을 듯이.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싸늘한 흔적을 어루만졌다. 켜켜이 쌓인 싸구려 직물에서 오래된 먼지가 부드럽게 휘날렸다. 탁하고 고운 흰 덩어리가 사이사이에 달라붙어 있는 그것...

로비가 모르는 건 없다

로벤트가 깨어난 이래로 내내 술렁거리던 계기판이 갑자기 멎었다. 연료가 들어오지도 않는데 막대는 빳빳하게 멈춰 중간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말 난데없는 사건이었다. 선체 전체를 관리하는 AI도 미처 염두에 두지 않은 일이었는지 당혹감을 채 숨기지도 못하고 이것저것 만지느라 정신이 없었다. 덩달아 놀란 제스는 우주인이 되기 위해 닳도록 외웠던 전공 서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