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모음

젊은 시절을 향해서

감각은 한순간에 끌어올려졌다. 가슴을 채운 바람에서는 싱그러운 향기가 났다. 여름 나무 아래를 거니는 것처럼. 살갗을 간질이는 햇볕은 무척 따뜻했다. 갓 말린 이불처럼. 귓가를 맴도는 새의 노랫소리는 부드러웠다. 아가의 자장가처럼. 마침내 뜬 시야를 메우는 풍경은 또 어떠한지. 세상은 기억하는 것보다도 더 아름답고 찬란했다고, 그는 멍하니 생각했다. 상념에...

눈 올 때 걷는 것은 참으로 낭만적으로 고독

세상은 온통 침묵에 잠겨 있다. 하늘에서는 그 색을 닮은 보드라운 단정함이 쏟아지고 북풍은 날뛰는 검은색 군마처럼 달려든다. 그럼에도 귀를 덮는 것은 오직 정적뿐이다. 마치 세상과 동떨어져 오직 홀로 남은 듯이, 빛으로 가득함에도 외롭고 차가운 고요만이 있다. 창틀을 거머쥐고 앉은 원은 매화 대신 만개한 겨울을 바라보며 얕은 숨을 거듭 내쉬었다. 아침 안개...

창문은 죽음과도 같은 흰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당연히 너머는 보이지 않았다. 달빛 어린 눈보다도 새하얀 사각이 전부인 이 순간에. 미약하게 스며든 빛은 이 철없는 종말에도 무언가 남아있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령은 하얀 직물 위에서 뭐라도 찾아 보이겠다는 듯이 한참을 바라보았다. 지난 저녁 우레와 같은 커다란 굉음이 나더니만 그 후로 이 태양 빛은 저물...

새하얀 마을과 한 노부부

아주 길었던 내 모험은 하얀 대지 끝의 고즈넉한 마을에서 끝을 맺었다. 별칭이 겨울이라는 이 동네는 서른 가구 정도가 사는 아주 작은 곳으로, 건물이 하나같이 그 이름답게 새하얬다. 당연하게도 나 또한 하얀 집 하나에 세 들어 살게 되었다. 짙푸른 산을 등지고 이웃에게 손 뻗은, 천사의 날개처럼 희고 아름다운 외곽의 저택이었다. 나는 그곳의 2층에 짐을 풀...

ㅇ 사용한 서체 Mapo금빛나루, 제주명조, 수성바탕체, 경기천년제목, 경기천년바탕, 김해가야체, 서울한강체, 코트라 손글씨체

낮은 자존감과 부정적인 감정에 대해 다루고 있으니 열람에 주의 바랍니다. 저는 저주에 걸렸습니다. 만물을 미워할 방도를 잃어버렸습니다. 고약한 악취를 맡아도 싫어할 수 없으며 역겨운 광경을 목격하더라도 끔찍하게 여길 수가 없습니다. 혹자는 사랑만을 안다면 참으로 행복할 것이니, 기쁘게 생각하라며 충고했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저는 이 ...

그를 떠올렸음은 곧 그 애를 사랑한 것이라

내 마음은 항상 그 애로 가득했다. 나를 이루는 모든 뼈대는 전부 그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이름, 외모, 호오, 성격, 행동, 사소한 말 한마디마저도 그러했다. 어쩌면 나의 탄생은 오직 그를 담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추측이 아니라 진실이다. 그 애를 아껴 이 순간조차도 그의 회고로 생의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애는 나를 사랑하지 않...

아포칼립스

때때로 네 유산을 떠올리곤 했다. 대중의 손을 거치느라 아주 낡아빠진 너의 것을. 아마도 너는 네가 남길 게 어떻게 될지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흔적이 이토록 고요하고 차분할 리가 없다. 마치 황혼 녘 빠르게 저물어버린 태양을 그리워하듯이, 기울어 흩어지는 보름달을 가여워하듯이. 네 최초에 대한 기록이란 그러했다. 너는 이 현상을 섭리로 받...

고요하던 밤공기가 술렁거렸다. 의자에 몸을 묻고 잠을 자던 주인이 긴 숨을 내쉰 까닭이다. 나른한 허밍이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광채 어린 눈망울이 드러나고 양 뺨에서 생기가 솟구쳤다. 발그레한 입술이 오물거렸다. 여자는 느릿느릿 눈을 깜박이며 흐릿한 시야를 몇 번 닦아냈다. 적당한 온기가 주위를 부유한 까닭에, 눈꼬리를 적신 잠기운은 쉬이 가지 않는다. ...

빛전이 다른 빛전을 만난다는 리퀘

세상은 오늘따라 유독 아름다웠다. 길가의 작은 풀잎, 울타리에 앉은 나비, 지붕 위에서 노래하는 새 떼, 언덕을 적신 노란꽃, 적당히 따사로운 햇빛이 내리쬐고 바람마저 기분 좋은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이 모든 것에서 황홀이 흘러넘쳤다. 이, 모든, 것에서. 그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잘게 부서진 빛 조각들이 아른거렸다. 간만의 휴일이다. 마...

계단을 올라가는 발걸음은 너무나도 경쾌했다. 현을 노니는 손가락에서는 화려한 화음이 흘러내리고 활줄은 부드러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따사로운 햇볕이 쏟아지는 어느 날 오후다. 여유를 만끽하는 바람이 마을 어귀를 쏘다니고 만취한 참새들이 지지배배 우는 그런 때. 더구나 막 맞이한 초여름이란, 꽃 진 후 돋아난 초목이 짙푸르게 춤추고 움튼 생명이 범람하는 계절...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는 계절이 왔다. 산에는 파릇한 물결이 고개를 들고 들에는 향긋한 내음이 춤을 추는 나날의 시작이다. 따사로이 내리쬐는 햇볕, 하늘거리는 풀을 적시는 바람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답다. 금방이라도 나이 지긋하게 먹은 신선이 등장해 너털웃음을 터트릴 것만 같다. 이럴진대 어린아이의 짓궂은 웃음소리와 활기찬 발돋움을 듣고서 산수화에 맺힌 붉은 꽃...